조사이어 로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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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사이어 로이스는 1855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1916년 사망한 미국의 철학자이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국립 과학 아카데미, 미국 철학회의 회원을 역임했다. 그는 미국의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연구했으며, 절대적 관념론과 실용주의를 융합한 철학을 전개했다. 주요 저서로는 《철학의 종교적 측면》, 《캘리포니아》, 《현대 철학의 정신》, 《세계와 개인》, 《충성의 철학》, 《기독교의 문제》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논리학, 심리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윌리엄 제임스와 찰스 샌더스 퍼스의 철학적 유산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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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이어 로이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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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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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사이어 로이스 |
출생일 | 1855년 11월 20일 |
출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그래스 밸리 |
사망일 | 1916년 9월 14일 |
국적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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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
학력 |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문학사) |
학력 | 존스 홉킨스 대학교 (박사) |
학문적 배경 | |
분야 | 미국 철학 |
분야 | 서양 철학 |
시대 | 19세기 철학 |
시대 | 20세기 철학 |
사상적 경향 | 미국 실용주의 |
사상적 경향 | 객관적 관념론 |
사상적 경향 | 미국 관념론 |
주요 관심사 | 윤리학, 종교 철학, 형이상학 |
주요 사상 | 오류 가능성, 충성의 철학, 국제 보험 |
영향 | 헤르만 로체, 찰스 샌더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앨프레드 브레이 켐페, 조지 실베스터 모리스 |
영향을 받은 인물 | 클래런스 어빙 루이스, 윌리엄 어니스트 호킹, 에드워드 버밀리 헌팅턴, 가브리엘 마르셀, 헨리 M. 셰퍼, 브랜드 블란샤드, 티모시 스프리그, 모리스 라파엘 코헨, 존 윌리엄 밀러, 존 엘로프 부딘, 노버트 위너, 조지 허버트 미드 |
지도 학생 | |
지도 학생 | 커트 존 뒤카스 |
지도 학생 | 클래런스 어빙 루이스 |
지도 학생 | 조지 산타야나 |
지도 학생 | 헨리 M. 셰퍼 |
주요 제자 | |
주요 제자 | 엘라 라이먼 캐벗 |
주요 제자 | 메리 휘턴 칼킨스 |
주요 제자 | 윌리엄 헨리 체임벌린 (철학자) |
주요 제자 | 모리스 라파엘 코헨 |
주요 제자 | W.E.B. 듀보이스 |
주요 제자 | T.S. 엘리엇 |
주요 제자 | 에드윈 홀트 |
주요 제자 | 호러스 칼렌 |
주요 제자 | 빅터 렌젠 |
주요 제자 | 알랭 로크 |
주요 제자 | 윌리엄 페퍼렐 몬태규 |
주요 제자 | 로버트 E. 파크 |
주요 제자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주요 제자 | 안나 보인턴 톰슨 |
주요 제자 | 노버트 위너 |
학문 | |
박사 학위 논문 제목 | 인간 지식 원리들의 상호 의존성 |
박사 학위 논문 년도 | 1878년 |
지도 교수 | 윌리엄 제임스 |
지도 교수 | 헤르만 로체 |
지도 교수 | 찰스 샌더스 퍼스 |
지도 교수 | 빌헬름 빈델반트 |
지도 교수 | 빌헬름 분트 |
2. 생애
조사이어 로이스는 미국의 철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생애의 상당 기간을 미국의 서부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한 것으로 철학계에서 주목받았다. 그는 당시 미국 철학의 4대 거장 중 한 명으로, 역사학자로서의 명성이 철학자로서의 명성을 능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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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에서 처음 3년 동안 로이스는 영어 작문, 웅변술,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이후 철학 저술에 전념했지만, 초기에는 소설, 초자연 현상 연구, 문학 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역사학자와 철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1888년에는 너무 많은 분야에 손을 댄 결과 신경 쇠약으로 휴직해야 했다.
1883년 로이스는 한 출판사로부터 캘리포니아 주 역사를 저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하버드에서의 불안정한 상황과 철학적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작업을 부업으로 여겼지만, 1891년 역사 저술 경력을 마감한 후에도 캘리포니아 역사에 대한 비평과 논문을 발표했다.
1882년부터 1895년까지 로이스는 미국 철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885년 출판된 《철학의 종교적 측면》과 1892년 출판된 《현대 철학의 정신》은 하버드 강의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그의 철학적 입지를 굳혔다. 《철학의 종교적 측면》에서 로이스는 오류의 현실을 근거로 신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증명을 제시했다. 그는 모든 오류가 어떤 전체적 진실과 비교하여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하며, 우리는 스스로 무오류하다고 여기거나, 심지어 우리의 오류조차도 진실의 세계에 대한 증거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스는 이상주의가 가설에 의존하고 가설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우리의 아이디어가 속해 있는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객관적 참조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그는 이러한 가설이 없이는 "실용적인 삶과 가장 단순한 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념에 이르기까지 이론의 가장 일반적인 결과가 우리 모두에게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16]
로이스는 이상주의적 가설의 정당성이 실용적이라고 보았으며, 철학적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도하고 결정하는 요소로서 실용적인 삶을 포괄하는 범위 내에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는 "개별 정신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의 관계"에 대해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세대 철학자들에게 오류주의로 불렸으며, 찰스 샌더스 퍼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로이스는 인격주의를 옹호했는데, 이는 "의식적인 개인과 보편적 사상의 모호한 관계는... 보편적 사상의 요소로서 그들의 포함이라는 의미에서 결정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가설이며, 그 도덕적, 종교적 측면은 절대자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로이스는 기포드 강연에서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역사적 개념, 즉 "실재론", "신비주의", "''비판적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존재의 네 번째 개념"을 옹호했다. 그는 이러한 가설들이 각각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존재한다는 것은 전체와 유일하게 관계 맺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기포드 강연에서 로이스는 이러한 관계를 시간화하여, 우리가 통일되고 가변적인 "시간 간격", 즉 "겉보기 현재"의 질적, 지속적 에피소드 내에서 차이점과 방향성을 주목함으로써 순차와 공간과 같은 아이디어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이스는 "우리의 경험의 시간적 형태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의지의 형태이다"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로이스에게 의지는 자신을 넘어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 인정된 과거에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이다. 공간과 그것에 적합한 추상적인 설명은 이러한 역동성을 왜곡하는 것이며, 특히 "실재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오류는 이러한 추상화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시간적으로, 즉 실천과 자질의 세계에서 그것들이 하는 일에 비추어 고려될 때, 시간적 형태를 가지며 활동한다. 감상의 세계에 속하는 아이디어의 서술적 표현은 "설명보다 더 효과적이다...왜냐하면 공간은 실제로 우주의 무대와 배경을 제공하지만, 세계의 연극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세계에서 추상적으로 구상된 시간은 완전히 공간화될 수 없지만 우리에게 영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반면, 경험하고 살아가는 시간은 역사적으로, 윤리적으로, 미학적으로 이러한 설명의 근거가 된다.
로이스에게 논리에 따라 철학을 해야 하고 심리적이고 감상적인 경험을 철학적 교리에 통합해야 하는 것은 개념적 사고의 한계이다. 로이스에 따르면, 우리의 개념적 경험과 지각적 경험 사이에 병렬 관계가 있다는 증거와 전자를 후자의 가이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 특히 우리 내면의 목적을 이상화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더 큰 전체에서 다른 사람의 목적과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2. 1. 유년기와 교육
조사이어 로이스는 1855년 11월 20일 캘리포니아 그래스 밸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조시아와 사라 엘리너 (베일리스) 로이스는 영국에서 이민 온 가족이었다.[6] 이들은 1849년 미국 개척자들의 서부 이동에서 행운을 찾았다. 1875년 로이스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그곳에서 영어 작문, 문학 및 수사학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았다.대학교 재학 중 그는 조지프 르콩트에게서 배웠다. 르콩트는 지질학 및 자연사 교수이자 진화와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옹호하는 저명한 대변인이었다. 르콩트가 사망한 직후 발표된 추모사에서[6] 로이스는 르콩트의 가르침이 자신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그렇게 일어난 경이로움은 나에게 철학의 시작이었다"라고 묘사했다. 헤르만 로체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한 후,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으며,[7] 1878년 철학 분야에서 이 학교 최초의 박사 학위자 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존스 홉킨스에서 그는 독일 사상사에 대한 강좌를 가르쳤는데, 이는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며, 역사 철학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8]
2. 2. 학문적 경력
조사이어 로이스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영어 작문, 문학 및 수사학을 가르치는 강사직을 맡았다.[6] 대학교 재학 중 그는 지질학 및 자연사 교수이자 진화와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옹호하는 저명한 대변인이었던 조지프 르콩트에게서 배웠다. 르콩트가 사망한 직후 발표된 추모사에서 로이스는 르콩트의 가르침이 자신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그렇게 일어난 경이로움은 나에게 철학의 시작이었다"라고 묘사했다.[6]헤르만 로체와 함께 독일에서 유학한 후,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왔으며,[7] 1878년 이 학교 최초의 철학 박사 학위자 4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존스 홉킨스에서 그는 독일 사상사에 대한 강좌를 가르쳤는데, 이는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며, 역사 철학에 대한 고찰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8]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4년 동안 재직한 후, 1882년 윌리엄 제임스의 안식년 대체자로 하버드 대학교로 갔다.[9] 윌리엄 제임스는 로이스의 친구이자 철학적 대립자였다. 로이스는 1884년 하버드에서 정교수가 되었으며, 1916년 9월 14일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로이스는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국립 과학 아카데미, 미국 철학회의 회원이었다.[10][11][12]
3. 역사학
로이스는 생애의 상당 기간을 미국의 서부, 특히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역사를 연구하고 집필한 유일한 주요 미국 철학자였다.[13] 1883년 로이스는 한 출판사로부터 캘리포니아 주 역사를 저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 작업을 부업으로 여겼으나, 1888년 신경 쇠약으로 직무를 휴직해야 했다.[15] 1891년 그의 역사 저술 경력은 끝났지만, 캘리포니아의 역사적 저술에 대한 여러 비평과 그의 역사를 보완하는 저널 기사를 출판했다.[14]
4. 철학
로이스는 1882년부터 1895년까지 미국 철학계에서 가장 저명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1885년에 출판된 《철학의 종교적 측면》과 1892년에 출판된 《현대 철학의 정신》은 하버드 강의를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철학계에서 그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16]
로이스는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역사적 개념, 즉 "실재론", "신비주의", "비판적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존재의 네 번째 개념"을 옹호했다. 그는 실재론은 존재한다는 것은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비주의와 비판적 합리주의는 각기 다른 기준(신비주의는 직접성, 비판적 합리주의는 객관적 타당성)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로이스는 이러한 개념들이 각각 모순에 빠진다고 지적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전체와 유일하게 관계 맺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이 공식은 전체, 개별, 그리고 그들을 구성하는 관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핵심 측면을 모두 보존한다.
로이스는 "우리의 경험의 시간적 형태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의지의 형태이다"라고 설명하며, 시간 간격과 겉보기 현재와 같은 개념을 통해 순차, 공간과 같은 개념을 배우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의지가 자신을 넘어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 인정된 과거에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이라고 보았다. 공간 및 그와 관련된 추상적인 설명은 이러한 역동성을 왜곡하는 것이며, 특히 "실재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오류는 이러한 추상화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로이스는 철학이 기술적인 선을 따라 진행되므로 그 존재론을 일종의 허구로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이디어는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시간적으로, 즉 실천과 자질의 세계에서 그것들이 하는 일에 비추어 고려될 때, 시간적 형태를 가지며 활동한다. 그는 감상의 세계에 속하는 아이디어의 서술적 표현은 "설명보다 더 효과적이다...왜냐하면 공간은 실제로 우주의 무대와 배경을 제공하지만, 세계의 연극은 시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로이스는 개념적 사고의 한계를 지적하며, 논리에 따라 철학을 해야 하고 심리적이고 감상적인 경험을 철학적 교리에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개념적 경험과 지각적 경험 사이에 병렬 관계가 있으며, 전자를 후자의 가이드로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우리 내면의 목적을 이상화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직접적인 경험이 없는 더 큰 전체에서 다른 사람의 목적과 연결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4. 1. 절대적 관념론
로이스는 오류의 현실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했다. 그는 모든 오류가 어떤 전체적인 진실과 비교하여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를 오류가 없는 존재로 여기거나, 우리의 오류조차도 진실의 세계에 대한 증거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이스는 이상주의가 가설에 의존하고 가설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우리의 관념이 속하는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객관적 참조가 필요하다고 옹호했다. 이러한 가설이 없이는 실용적인 삶과 가장 단순한 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신념에 이르기까지 이론의 가장 일반적인 결과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16]로이스는 이상주의적 가설의 정당성은 실용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실용주의자라고 칭하며, 철학적 관념의 가치를 인도하고 결정하는 요소로서 실용적인 삶을 포괄하는 범위 내에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로이스는 "개별 정신과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신의 관계"에 대해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설명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세대 철학자들에게 오류주의로 불렸으며, 로이스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찰스 샌더스 퍼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
로이스는 "의식적인 개인과 보편적 사상의 모호한 관계는... 보편적 사상의 요소로서 그들의 포함이라는 의미에서 결정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인격주의적 견해를 옹호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현실이 더 높은 현실의 단편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현실은 어떤 힘도 아니며, 인간을 꿈꿈으로써 개인을 만들어내지도 않지만, 별개의 존재로서 그들에게 합리적인 완전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를 완성할 것이라고 했다. 로이스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가설이며, 그 도덕적, 종교적 측면은 절대자의 존재를 가리킨다고 믿었다.
로이스의 "절대자"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과 F. H. 브래들리의 생각과는 상당히 달랐다. 로이스의 절대자는 공동체의 근본이자 창시자이며, 과거를 완전히 보존하고, 해석 행위를 통해 현재를 유지하며,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예측하고, 이러한 가능성에 공동체의 이상으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인격적이고 시간적인 존재이다. 로이스는 이러한 신성한 활동을 찰스 샌더스 퍼스가 제시한 "아가페주의", 즉 "진화적 사랑"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행위의 불가역성 속에서 절대자를 경험한다고 믿었다. 우리의 행동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는 것은 시간적 필연성 속에서 절대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이스는 절대자에 대한 철학적 관념은 일관된 사상 체계를 위한 불가피한 가설이지만, 실용적인 목적과 의미 있는 윤리적 삶을 위해서는 모든 인간에게 지속적인 "해석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4. 2. 신 개념 논쟁
로이스의 경력과 사상에서 중요한 분기점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버클리 철학 연합에서 강연을 한 사건이었다. 이 강연은 표면적으로는 조지 홈스 하우이슨, 조지프 르 콩트, 시드니 메제스의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신 개념을 옹호하기 위한 자리였다. ''뉴욕 타임스''는 이 만남을 "거인들의 싸움"이라고 칭했다.[16]로이스는 이 강연에서 오류가 아닌 무지를 기반으로, 인식론적 불확실성이 아닌 개별적 존재의 단편성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신의 실재 증명을 제시했다. 그러나 하우이슨은 로이스의 교리가 절대자에 반하여 개인에게 어떠한 존재론적 지위도 부여하지 않아, 로이스의 관념론을 해로운 일종의 비인격주의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로이스는 이러한 결과를 결코 의도하지 않았으며, 하우이슨의 비판에 대해 논쟁에 대한 긴 부록(1897)으로 응답했고, 이후 그의 기포드 강좌에서 개인의 철학을 더욱 자세히 발전시켜 ''세계와 개인''(1899, 1901)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4. 3. 세계와 개인 (The World and the Individual)
로이스는 기포드 강연의 첫 번째 시리즈에서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역사적 개념, 즉 "실재론", "신비주의", "''비판적 합리주의''"에 반대하고 "존재의 네 번째 개념"을 옹호했다.[16] 로이스에 따르면 실재론은 존재한다는 것은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신비주의와 비판적 합리주의는 각기 다른 기준(신비주의는 직접성, 비판적 합리주의는 객관적 타당성)을 제시했다. 로이스는 존재의 근본적인 특징에 대한 가설로서 이들이 각각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대로 로이스는 "존재한다는 것은 전체와 유일하게 관계 맺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시하는데, 이 공식은 전체, 개별, 그리고 그들을 구성하는 관계라는 존재의 세 가지 핵심 측면을 모두 보존한다.로이스는 기포드 강연의 두 번째 시리즈에서 이러한 관계를 시간화하여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통일되고 가변적인 "시간 간격", 즉 "겉보기 현재"의 질적이고 지속적인 에피소드 내에서 차이점과 방향성을 주목함으로써 순차, 공간과 같은 개념을 배우게 된다고 보았다. 로이스는 "우리의 경험의 시간적 형태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의지의 형태이다"라고 설명한다.
4. 4. 충성심의 철학 (The Philosophy of Loyalty)
로이스의 "충성심" 개념은 기독교적 아가페적 사랑을 보편화하고 에큐메니컬하게 해석한 것이다. 로이스의 철학은 점차 덜 즉각적인 이상에 대한 우리의 충성이 개인적 발달에 있어서 형성적인 도덕적 영향력이 되는 미덕 윤리이다. 개인이 충성심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 커지고, 자신보다 더 큰 대의에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헌신을 하게 되며, 이러한 충성심이 여러 세대에 걸쳐 개인 집단의 더 높은 목적 안에서 통합될 때, 인류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완벽한 "사랑받는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이 가장 높은 이상임을 점점 더 잘 인식하게 된다.[17] 우리의 충성스러운 봉사 행위에서 경험되는 이상으로서의 사랑받는 공동체는 로이스의 도덕 철학에 목적의 왕국을 통합하지만, 초월적이고 규제적인 것이 아닌 내재적이고 작동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이러한 이상이 철학적으로 어떤 지위를 갖는지는 가설로 남아 있지만, 우리가 유한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모든 개인에게 구체화된다. 우리 각자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미성숙하더라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선 경험의 현실을 가리키는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더 넓은 현실은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가장 일반적으로 예시된다. “[연인들의] 영적인 결합은 또한 인간적인 수준보다 더 높은 개인적이고 의식적인 존재를 갖는다. 충성심이 제대로 확립되어 있다면, 현실적인 대의가 우리 자신의 진정한 헌신을 얻는 모든 곳에서 유사한 의식의 통일성, 즉 인간적 수준보다 더 높은 통일성이 존재해야 하지만, 우리의 개별적인 인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한 가설을 인정하면, 충성심은 신화에 대한 가련한 봉사가 아니다. 우리의 대의가 가진 선은 또한 인간적 수준보다 더 높은 경험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이 된다.” (''The Philosophy of Loyalty'', p. 311).
이러한 움직임은 로이스가 그의 "절대적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상은 철저하게 실용적이며, 더 포괄적인 것이 더 실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상의 구체화는 우리의 의식적인 삶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드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경험적으로 의심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상이 진정으로 구체화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로이스는 우리가 그러한 이상이 존재하는 더 큰 지적인 구조, 즉 신성한 의지의 목적적 성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현실로 간주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더 높은 대의와 낮은 대의를 구분하는 방법은 자신의 봉사가 다른 사람의 충성심, 또는 그들의 가장 좋은 점을 파괴하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인격은, 우리가 궁극적인 충성심이 충성심 자체에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잃어버린 대의에 봉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절정에 이른다.
4. 5. 기독교 문제 (The Problem of Christianity)
The Problem of Christianity영어에서 로이스는 성령, 가톨릭 교회, 성도의 교제를 보편적인 공동체로 설명하며, 공유된 기억과 희망을 통한 상호 해석적 활동을 강조한다.[16]5. 논리학
로이스는 하버드 논리학, 부울 대수, 수학의 기초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논리학, 논리학 철학, 수학 철학은 찰스 퍼스와 알프레드 켐페의 영향을 받았다.[4]
로이스에게서 논리학을 배운 제자로는 양상 논리를 개척한 클래런스 어빙 루이스, 부울 대수를 최초로 공리화한 에드워드 버밀리에 헌팅턴, 그의 이름을 딴 획으로 알려진 헨리 M. 셰퍼가 있다.[4] 로이스의 논리학과 수학에 관한 많은 저작들은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수학 원리''의 외연 논리에 비판적이며, 그들의 접근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읽힐 수 있다.[4] 그의 논리학과 과학적 방법에 관한 많은 글들은 ''로이스'' (1951, 1961)에 재수록되어 있다.[4]
6. 심리학
로이스는 개인의 자아와 사회의 타인 간의 상호 관계를 연구하여, 자아 개념이 사회적 상호 작용을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조지 허버트 미드의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18]
로이스는 자아가 사회적 상호 작용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며, "경험적 자아는 원래부터 우리의 사회적 경험에 의존한다. 실제 사회생활에서 자아는 항상 타인과의 대조를 통해 인식된다."라고 썼다.[19][20]
또한, 과대망상이나 피해망상과 같은 증상을 사회적 지위와 세상에 비추어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비롯된 일상적인 자의식의 왜곡으로 보면서, 사회적 자아가 병에 걸릴 수 있다고 보았다.[21]
어빙 고프만은 1895년 로이스가 광기의 과대망상에서 나타나는 주관적 자아 감각의 왜곡을 연구한 것이 75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탁월하다고 평가했다.[22]
7. 유산
- 헤드-로이스 스쿨(Head-Royce School): 로이스 스쿨(The Royce School)이 안나 헤드 여자 학교(Anna Head's School for Girls)와 합병하여 설립되었다.[13][14]
- 로이스 홀(Royce Hall): UCLA의 최초 4개 건물 중 하나이다.[13][14]
- 그래스 밸리 공공 도서관(Grass Valley Public Library): 1933년 로이스를 기려 명칭이 변경되었다.[13][14]
- 조시아 로이스 홀: 프레즈노 고등학교에 있다.
- 로이스 하우스(Royce House): 존스 홉킨스 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 볼티모어 홈우드 캠퍼스(Homewood Campus)의 동문 기념 레지던스 중 하나인 기숙사이다.[13][14]
- 로이스 피크(Royce Peak):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정상이다.[13][14]
8. 주요 저작
출판 연도 | 저서 |
---|---|
1885년 | 철학의 종교적 측면 |
1886년 | 캘리포니아: 1846년 정복부터 샌프란시스코의 두 번째 자경단까지의 미국적 특성에 대한 연구 |
1892년 | 현대 철학의 정신 |
1897년 | 신의 개념, 증명 가능한 현실로서의 신성한 아이디어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논의 |
1899년, 1901년 | 세계와 개인 |
1908년 | 충성의 철학 |
1913년 | 기독교의 문제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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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 Philosophy 1760–1860: The Legacy of Idealism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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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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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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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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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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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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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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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rchive.org/[...]
Harper &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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